
결혼하기 전, 우리 부부는 같은 직장에서 만나 연애를 했습니다.
하루는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일을 마치고 함께 퇴근하던 날이었습니다. 아침에는 비가 내렸지만 퇴근할 무렵에는 비가 그쳐 있었고, 내 손에는 작은 접이식 검정 우산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.
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편이었습니다.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나니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, 손에 들린 작은 우산 하나조차 무겁게 느껴졌습니다.
그래서 함께 걷던 그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습니다.
"우산 좀 들어 줄래?"
어쩌면 정말 힘들어서였을 수도 있고,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잠시 기대고 싶었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.
그런데 그는 선뜻 들어주지 않았습니다.
나는 조금 당황했습니다.
'내가 이렇게 힘든 걸 알면서 왜 거절하지?'
다시 한번 부탁했지만 대답은 같았습니다.
순간 서운함과 자존심이 뒤섞이며 마음이 무너졌습니다.
결국 나는 오기 섞인 마음으로 그 우산을 길가에 버리고 와 버렸습니다.
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한 행동이었습니다.
하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버리고 싶었던 것은 우산이 아니었습니다.
이해받지 못했다는 서운함이었습니다.
잊은 줄 알았던 그때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
신기하게도 그 일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떠올랐습니다.
중년이 되어 남편과 갈등이 생길 때마다 오래전 우산 사건이 불쑥 생각났습니다.
곰곰이 돌아보니 내가 기억하는 것은 우산이 아니었습니다.
'내가 힘들다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던 순간.'
그 감정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.
부부 갈등의 많은 부분은 현재의 사건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.
현재의 갈등 속에는 과거에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.
그래서 작은 일도 때로는 큰 다툼으로 이어집니다.
나는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었습니다
시간이 흐른 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원가족의 관계 패턴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.
그때 문득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.
아버지는 강한 분이셨고, 어머니는 늘 참고 순응하는 분이셨습니다.
어머니는 자신의 감정보다 가족의 평화를 먼저 생각하며 살아오셨습니다.
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.
나 역시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.
나도 갈등을 피하려 했고,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담아 두는 사람이었습니다.
배려한다고 생각했지만, 사실은 내 감정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.
우산 사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.
우산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, 내가 살아온 관계 방식이 그 안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.
나를 이해하기 시작하자 관계도 달라졌습니다
그 이후 나는 남편을 바꾸려 하기보다 먼저 나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.
'왜 나는 서운함을 말하지 못할까?'
'왜 상대가 먼저 알아주기만 기다렸을까?'
그리고 조금씩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.
"당신은 왜 그래?" 대신,
"나는 이런 상황에서 많이 서운했어."
라고 말하는 연습을 했습니다.
처음에는 어색했고 두렵기도 했습니다.
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변하기 시작하자 관계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.
남편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, 나 역시 남편의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었습니다.
서로를 바꾸려 하기보다 서로를 이해하려 할 때 우리의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졌습니다.
그날 버린 것은 우산이 아니었습니다
행복한 결혼생활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.
나 자신의 관계 패턴을 이해하고,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돌아보며, 함께 성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.
돌이켜 보면 그날의 우산 사건은 작은 사건이었지만 내 인생에는 큰 깨달음을 남겼습니다.
세월이 흐른 지금 돌아보니, 그날 버린 것은 우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.
나는 그 우산을 통해 이해받고 싶었던 어린 나를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습니다.
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관계인 배우자를 통해 내 안의 상처와 관계의 패턴을 비추어 주셨습니다.
배우자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, 나를 성장하게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.
그래서 이제는 오래전 그 우산 사건마저도 감사하게 기억합니다.
그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남편을 이해하는 법보다 먼저, 나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.
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.
"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." (베드로전서 4:8)
사랑은 상대를 바꾸는 힘이 아니라, 서로가 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힘입니다.
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관계를 통해 우리를 조금씩 빚어 가십니다.
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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